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空)은 열려 있다.
내 사진은 사물의 존재로 향하고 있다. 특히 물, 돌, 풀 등 자연 자체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요 애정이라 해도 좋다. 내가 왜 자연으로 눈을 돌린 것일까. 내 눈을 끄는 것은 대개의 경우 인간을 떠난 자연이었다. 내가 지향하는 자연의 사진이란 이런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의 재현이 아니라, 그 안 깊이 잠겨 있을 시원에 대한 향수, 하늘이 열리던 때의 그 아득함을 생각한다. 그것을 찍고 있다가 아니라, 찍고자 한다, 찍고 싶다. 하지만 시원의 하늘이, 광야를 나는 아직 열지 못하고 있다. 그리로 가고는 싶은데 가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 깊은 속으로 들어가 시원의 하늘과 땅을 드러낼 방법을 아직은 모른다. 자연의 그 장엄함이 원시의 힘찬 숨결이 저절로 느껴지는 그런 풍경을 향해 서 있을 뿐 그리 들어가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한 개 사물을 통해 그 안에 숨어 있는 시원을 찾아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모색해 오던 사진의 경지, ‘적정, 적멸(寂靜, 寂滅)’ 곧 ‘공(空)’의 경지라는 것도 결국은 사물의 근원적 존재 양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움직임이 사라진 고요, 움직임도 움직임이 아님도 아닌 고요, 다시 말해서 생성 소멸을 벗어나 형태도 사라지고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경지,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은 열려 있다. 그 곳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내 <고요>의 또 하나의 시도이기도 하다.태풍의 눈이 그러하듯 모든 움직임의 중심은 고요하다. 그 고요가 곧 ‘공’이다. 존재의 근원이다. 적정, 적멸이 그것이고, 그리고 이 <고요>는 그 ‘공’을 향한 나의 발자국이다. 하늘이 열리던 날의 바람소리가 듣고 싶다. 땅이 처음 솟던 날의 울림을 느끼고 싶다. 그 땅으로 처음 싹을 피워 올린 풀잎의 작은 촉감을 손가락 끝에 누리고 싶다.
한정식(1937-2022) 작가 소개
한국 사진예술을 대표하는 한정식은 ‘고요’의 미학을 완성한 사진가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한국 고유의 미와 동양 철학을 바탕으로 ‘한국적 사진예술’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2015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작가 5인에 선정되어 그의 평생에 걸친 작업들을 소개하는 <한정식_고요> 전시를 2017년 개최하였다.
한정식은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60년대 일본 니혼대에서 사진학을 전공했다. 1982년부터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한국사진예술의 기틀을 만드는데 전념하였으며 2002년 은퇴할 때까지 수많은 후학들을 가르쳤다. 1987년 ‘카메라루시다’ 한국사진학회를 창립하였고 한국사진예술의 대표 이론서 ‘사진예술개론’ 를 포함해 20여권의 사진이론서와 사진집을 발간함과 동시에 ‘나무’ ‘발’ ‘풍경론’ ‘고요’ 시리즈 등을 통해 한국적 예술사진을 개척하였다.
한정식의 대표작업 ‘고요‘ 시리즈는 평생의 시간동안 그가 존재의 본질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주제로 작가가 지닌 내면의 의식을 추상의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들로 한국의 정신미학과 문화정체성 위에서 한국사진예술의 근간과 토대를 제시하는 작품들이다. 한정식은 “사진의 예술성을 향해 사진이 추구하는 것은 추상의 세계이다. 이는 사진이 가지고 있는 주제(theme)라는 것 자체가 추상적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진이 사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존재성을 사진 위에서 지워 사진 그 자체를 제시하여야 한다.” 이야기하며 서구미학에 기반한 현대예술사진의 영역에서 한국 고유의 사진예술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적 예술사진’ 을 개척하였다는 평가와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하여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 한미사진미술관, 고은사진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2022년에는 그의 작품 세계를 높이 평가한 베를린 아트센터, 뉴욕 현대미술갤러리로 부터 초대를 받았으나 병환으로 실현되지 못하지 못하고 2022년 7월 별세하였다. 정에스 김은 로버트 코넬리우스 포트레이트 어워드,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 어워드, 알 재단의 비주얼 아트 어워드, C4FAP의 디렉터 초이스 어워드, 그랜드 프릭스 심사 어워드 등을 수상하였을 뿐만 아 니라, 포토루시다의 크리티컬 매스의 탑 200에 선정되는 등 미국에서 사진작가로서 공고히 자리매김 하고 있다. 또한, 2013년, 프랑스 파리의 에디션스 베사드 출판사가 그녀의 “써클” 시리즈를 진 컬렉 션으로 출간하여 유럽을 포함한 미국에 널리 소개되었으며, 현재 그녀의 작품들은 프랑스의 FNAC(국 립현대미술기금), 이탈리아의 이마고 문디 컬렉션, 뉴욕의 우드스탁 포토그래피 센터, 대림 미술관 및 삼탄 아트 마인 미술관을 포함한 다수의 기관들과 개인 컬렉터들에게 소장되어 있다.